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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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회가 만난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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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회가 만난 형제들

가을

관리자 0 5049

<주간연예 게재>                                                                                                              

                                                                                                                         글쓴이 박춘선


언제 이렇게 세월이 지나갔던가? 누군가의 입에서 ‘추석’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새삼스럽게 벽에 오도카니 걸려있는 달력을 쳐다본다. ‘이 무더위가 언제 가려나. 여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라며 구시렁거리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 성큼 우리 곁에 다가와 있었다. 하긴 추석이라고 딱히 할 것도 없으련만, 왠지 마음이 분주해진다. 

 

뽀송뽀송한  쌀가루로 송편을 빚을 때, “얘야 송편을 예쁘게 만들어야 시집가서 예쁜 딸을 낳는다.”라고 하시며 함박웃음 지으시던 어머니, 어머니와 함께 송편 빚던 그 시절, 언덕에 올라가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 빌던 그 시절은 다 어디로 흘러가고, 그저 먼 곳으로 떠나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만이 애틋할 뿐이다. 

 

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아니던가, 가을 하늘이 높으니 말이 살찐다.’라고 했다. 풍요로운 계절 가을, 청명한 높은 하늘, 길가에 코스모스 하늘거리고 노란 꽃을 피운 해바라기가 해님 따라가는 이 가을이 나는 정말 좋은데, 삶에 지친 그들은 행복해 보이기는커녕, 다가오는 추석은 명절이 아니라, 찬 서리 내리는 겨울 걱정 때문에 몸을 움츠리게 하는 모양이다. “날씨가 좋으니 좋지요. 그럼 뭐 합니까? 살 걱정이 태산 같은데요.”라는 시큰둥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겠지? 나는 겨울을 생각하며 함박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길을 걷고 싶은 마음에 가슴까지 두근거리는데. 그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혼이 날 것 같아 입을 다문다. “괜찮아지겠지요. 괜찮아 질 겁니다. 낙심은 마음조차 무겁게 하니까, 곧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면 마음이 좀 편하지 않을까요?”라는 말로 위로랍시고 떠들어 보지만, 그들의 표정은 거짓말 쪼끔 보태서 말한다면 “너 지금 놀고 있냐?”라고 하는 것 같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이 세상에 걱정하고 고민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어렵고 힘들고 한숨 쉴 일이 무엇이 있을까마는,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입가에 따뜻한 미소 한 번 지을 수 없는 그런 삶이 여기에 있었다.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잠잘 곳을 고민하며, ‘내일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염려로 지을 수 있는 미소는 잠시, 기쁘게 웃을 수 없는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고민해 보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약한 병 때문에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가 없고, 나이가 많아 써 주지 않으니 결국 주저앉아 버리는 그들, 

 

가을 햇빛 받으며 살랑살랑 옷깃을 여미며 자태를 뽐내는 코스모스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맑은 가을 하늘 바라보며 추석 명절을 기쁘게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어찌 자식을 잊고 살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많이 보고 싶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냥 잘 살아주기만을 기도할 뿐이지요.”라며 눈시울 적시는 그들의 가슴은 통곡하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모 노릇 제대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염치로 자식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그 가슴속엔 뜨거운 붉은 피가 솟아오르고 있을 것이다. 고향이 그리워도 갈 수 없는 그들, 자식이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라는 말을 쏟아낼 기력도 없는듯한 그들의 고달픈 삶이 애처로운 빗물이 되어 가슴을 적신다. 

 

가을은 어느덧 우리 곁에 다가와 풍요로움이 한창이고 나뭇가지 이파리는 색동옷으로 갈아입는데 그들에게 있어 낙엽 지는 가을은 아름다움이 아닌 삶의 고달픔으로 빛이 퇴색되어 가는 인생의 허무함으로 가득하다. 

 

언제 다시 오려는가! 새로이 다가오는 계절이 슬픔과 고달픔으로 가는 길이 아닌 기쁨과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는 그 날이, 그리고 언제 다시 오려는가, 뿌듯한 가슴을 안고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아 청명한 하늘을 날아오를 바로 그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죽기 전에 부모님 산소라도 한 번 찾아봐야 할 텐데”라며 불효자식이 되어 버린 한 많은 죄스러움에 고개 숙인 그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 지을 수 있는 그 날이 꼭 오리라. 

 

가을은 왔는데, 곧 추석이 될 텐데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이 마음이 아파 그들의 힘없는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도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 한 끼 먹고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그들의 등은 빈 등이건만, 무거운 짐을 한 무더기 진 듯 허리가 휘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작은 희망 한 줄기가 내려 줄 것을 꿈꾸며 온종일 희망을 찾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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